2008년 07월 15일
존재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의 자취방에서 밤을 샜다는 글을 읽고, 난 추리 소설에 깔려있을 법한 부자연스러움을 느꼈다. 어느 구석이 그런지도 콕 집어서 긁을 수가 없었기에 가려움에 몸부림쳤다. 골똘히 생각했으나 답은 나오지 않는다. 배고픔은 호기심을 이기기 때문에, 주린 배를 잡고 부엌으로 갔다. 오이에 양념을 한 것이 아니라 양념에 오이를 담근 듯한 경상도식의 소박이를 젓가락으로 집었을때, 김전일처럼 소리쳤다. 수수께끼는 모두 풀렸다.
친구 사이에서 하면 안 되는 일이 있다. 삼세판을 좋아하는 국민 정서에 따라, 간단하게 세 가지만 들어보겠다. 첫째, 친구의 연인을 탐내면 안된다. 둘째, 친구에게 보증은 서 주지도 부탁하지도 말아야 한다. 셋째, 친구끼리는 듣기 좋은 별명 붙이지 않는다. 우리는 세번째 조건을 가장 잘 지키고 있잖는가. 존재라니, 정말 친구가 맞습니까. 그렇게 이지적인 별명이라니요.
고등학교 교실은 동물원이었다. 다리가 두꺼워서 코끼리, 팔이 길다고 침팬지, 젖살이 오른 친구는 곰인데 그 친구가 겨울에 하얀 코트를 입으면 백곰이 된다. 그래도 동물 이름은 붙이는건 정감이 가기라도 하지, 이름으로 놀리는 것은 유치해서 말하기도 부끄럽다. 상도는 크라운 산도, 병기는 똥통이 된다. 세상과 조화를 이루고 살라며 부모님이 붙여주셨다던 하모니라는 멋진 이름은 할머니로 바뀌었다. 중학교 때 친구 하나는 돌출된 구강 구조 때문에 별명이 턱이었다. 모두가 턱이라고 불러서 본명은 기억나지도 않는다. 수학 시간에 선생님이 그 친구를 호명하며 앞에 나와서 문제를 풀어보라고 하셨는데, 자신의 이름을 잊은 그녀는 자기 할 일을 하다가 두세번 불려진 뒤에 칠판으로 뛰어갈 정도였다. 문제는 설악산으로 갔던 수학여행에서 생겼다. 턱이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벽에 붙더니 알 수 없는 몸짓을 취하다가 이불로 들어가서 눕는 것이 아닌가. 친구들은 귀신에 홀린 듯한 턱을 두려워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으나 여중생답게 그 긴장은 오래 가지않고 아침이 되자 턱의 별명을 늘려주었다. 그래서 몽유턱이 되었다.
# by 김복숭 | 2008/07/15 10:51 | 판타스틱 소녀백서 | 트랙백 | 덧글(23)
2008년 07월 09일
아버지가 상의도 없이 차를 지르셨다. 친구는 정말 로또가 된 것이 아니냐고 했지만, 당첨금이 있다면 삼십사개월 할부로 지를리가 없잖아. 여하튼 오년 넘게 굴리던 무쏘는 중고로 팔게 된 모양이다. 아침에 아버지가 식탁에서 눈시울이 촉촉하게 젖으셔서는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무쏘가 팔려가니 가슴이 미어진다라고 하셔서, 잠깐 내 귀를 의심했다. 그런데 저녁에 오셔서도 무쏘가 팔려갔는데 정이 들어서 내주기가 힘들더라고 하셔서, 아버지가 팔고 오신 것이 무쏘가 아니라 무소였나 싶을 정도였다. 외양간에서 기르던 누렁이를 파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슬퍼하시냐고 물었더니, 나에게는 그것과 다를 게 없다며 또 코 끝이 벌게시지는 것이 아닌가. 이런 유전자 아래 태어났는데, 어째서 이큐가 낮다고 아르바이트 짤린걸까.
# by 김복숭 | 2008/07/09 22:22 | 판타스틱 소녀백서 | 트랙백 | 덧글(25)
2008년 07월 09일
말하자면 나는 좋은 환자이다. 물론 내가 지불하는 것은 아니지만 의료보험비를 충실하게 납부하고 있으며, 정해진 횟수에 따라 약을 챙겨먹고, 그만 와도 되겠다고 할 때까지 치료를 받기 때문이다. 최근에 보름 정도를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심지어 일요일도 병원에 가게 되면서, 길 가다가 붕어빵을 보아도 삼백원을 쓸까 말까 고민할 정도로 내 주머니는 배고파졌다. 두세달 모아놓았던 비상금이 한 순간에 털리는 경험을 한 사람이라면 병원에 대해서 호감을 갖기 힘들 것이다. 나 또한 충치 먹은 작은 어금니에 이십만원을 붓고, 십초가 걸리지 않는 간단한 검사에 십만원을 내면서부터 병원이 다른 의미로 무서워졌다. 게다가 약은 또 어찌나 많은지, 살고 싶으면 다이어트 따위 때려치우고 일단 먹으라는 가르침이 거북한 위에서 느껴졌다. 하루에 항생제가 열 알이다. 병원에 가서 차트를 넘기시던 선생님이 한 말씀 하셨다. 약은 먹을 만 하던가요. 속이 쓰리던데요. 웬만한 균은 다 죽일 정도로 강한 약이니까 독할 겁니다. 삼일 치를 처방해줄테니 약을 다 먹고나면 오라는 말을 듣고서 일어서는 내 등 뒤로, 의사 선생님이 덧붙이셨다. 미국은 깨끗한 나라니까, 자연 치유 될 수도 있어요.
# by 김복숭 | 2008/07/09 11:26 | 판타스틱 소녀백서 | 트랙백 | 덧글(17)
2008년 07월 04일
그녀는 말한다. 나 미국 가.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겠어. 장면은 바뀌고, 깃 세운 트렌치코트를 입은 여자는 여행 가방을 끌고 공항에서 작별 인사를 한다. 건강하라는 그의 말에 그녀는 대답하지 않은 채로 걷는다. 시야에서 사라지는 비행기를 보며 그는 복잡한 표정을 짓는다. 그의 손에 들린 종이컵에서 나온 하얀 김이 안경에 서려, 울었는지 웃었는지 알 수가 없다.
우아하게 출국할 수 있는 방법을 드라마 작가에게 묻고 싶었다. 동사무소, 세무서, 구청, 대사관을 뛰어다니며 익숙한 구센티 하이힐이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순례자처럼 관공서를 돌게 된 것은 계획에 없던 일이었고, 갑자기 해가 반대인 곳으로 가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것은 자다가 받은 한 통의 전화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짐을 싸라. 어머니의 뜬금없는 말에 나는 눈도 제대로 못 뜬 채로 반문했다. 갑자기 짐을 싸라니 뭔 소리야. 외국 나가야지. 그제서야 눈을 좀 떴다. 내가 갑자기 외국에 왜 나가. 그 다음에 무슨 말이 오고 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누가 들었으면 망나니 딸을 해외로 치워버린 재벌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나는 전화를 끊고 다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갑자기 나보고 외국에 나가라는데 무슨 소리야.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역시 미국이 좋지 않겠니. 한국의 정규 교육과정을 받은 사람이라면 당연하겠지만 현재의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하지만 내 더딘 적응과는 무관하게 유학원을 통한 수속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사흘 만에 학교를 결정하고나니 뒤따라 여권이 나오고, 입학허가서가 나오고, 비자가 나오고, 노스 웨스트에서 왕복 항공권을 예매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어머니와 다툼에서 미국이 등장하는 것을 보며 무적의 히든 카드를 쥐셨구나 한숨이 나왔지만 결과적으로 아이템을 얻은 것은 부모님이 아니라 나일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로또가 당첨되거나 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 by 김복숭 | 2008/07/04 04:19 | 판타스틱 소녀백서 | 트랙백 | 덧글(34)
2008년 06월 13일
아르바이트를 관두게 되었다. 어차피 개인 사정으로 곧 그만 두겠다고 말한 상태였지만, 한달을 못 채우고 나오게 될 줄은 몰라서 당황했다. 하지만 나를 더 황당하게 한 것은 그 이유였다. 보통 아르바이트를 그만 두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권유를 받게 되는 상황은 그 업무의 수행 능력이 부족하다든가, 행동에 문제가 있어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되는 그런 것이 아닌가. 하지만 나는 일도 잘하고 인간적으로도 신뢰할 수 있지만 성격이 문제라는 지적을 받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웃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사장님은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역동적인 눈코입으로 자신이 걸어온 여정을 보여주는 것 같은 사람이었다. 어머니 뱃 속에서 나올 때, 울음보다는 웃음을 보여서 엉덩이를 때린 의사를 당황하게 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미국에서 살다 온, 전형적인 스포츠맨이어서 작은 일에도 쉽게 눈을 크게 뜨고 웃고 찌푸리고 입을 벌려서 감정을 표현했다. 그러니까 얼굴 근육마저 귀차니즘에 걸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나를 보면 기분이 좋지 않거나 아픈가하고 의심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네가 탄 비행기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어떠냐고 물었다. 나는 비행기니까 흔들릴 수도 있지하고 신경쓰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는 아니나다를까 주먹을 손바닥에 딱 치며 나를 두번째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니까 문제야, 이큐가 낮은거라구요. 이큐라면 감정 지수가 아닌가. 갑자기 난데없이 튀어나온 단어를 현재의 상황과 연결시켜보려고 내 뇌는 점심에 먹은 고구마를 연료로 써서 부지런히 움직였다. 사장님은 이게 어떤 학자가 말한 이큐의 측정법이라며, 이 상황에서 더 크게 변화를 보이는 사람의 이큐가 높은 것이란다. 결국 난 이큐가 낮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나처럼 무덤덤한 사람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며, 성격을 바꿀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나는 성격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도 없었고, 바꿔야하는 이유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그만 두겠다고 대답한 것이다. 친구들은 비정규직의 슬픔이라느니, 이런 퇴직 사유는 라스베가스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며 나를 위로해주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에 친구가 물었다. 난 이큐가 낮다는 그런 이유로 짤렸다면 화가 많이 날텐데, 어쩐지 너는 아무렇지도 않아보이는구나. 나는 가게 문을 닫고 나올 때부터 별로 개의치 않았으며, 지금은 그 일을 거의 잊다시피했다고 대답해주었다. 그랬더니 그는 말했다. 그건 니가 이큐가 낮아서 그래.
# by 김복숭 | 2008/06/13 11:35 | 판타스틱 소녀백서 | 트랙백 | 덧글(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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